초속 5cm /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Posted 2008. 2. 23. 01:00,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전에 시나몬님 덕분에 보게 된 "초속 5cm"의 삽입곡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입니다. 저는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영화를 본 것도 작년 여름이니까 시간이 꽤 흘렀는데, 불현듯 이 노래가 생각나네요.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하니 혹시 이 영화를 보실 생각이 있으신 분은 영상을 보지 마시길. ^^

Response : ,

또 다른 블로그 소개

Posted 2008. 2. 22. 22:22,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네, 전에 서평 및 칼럼 팀블로그 "책, 계"를 시작한다는 포스팅이 있었지요?

이번에는 "도서관 희망 원정대"를 소개합니다. 도서관 희망 원정대는 도서관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단체이고요, 이번에 공식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surfysea가 작업했지요. ^^v 티스토리 초대장이 없어 방황하던 중 도움주신 지하생활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또 surfysea의 짧은 생각들을 저장해 두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surfysea의 미투데이"입니다. 민트향이 나는 미투데이라고 부제를 붙여봤어요. ㅎㅎ 미투데이 가입하시면 댓글도 좀 달아주시고요. :D
Response : ,


오늘은 시나몬님과 함께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을 보았습니다. 사실 M은 여간한 극장에서는 막을 내린 지 오래지만, 관객들의 요청에 따라 씨네큐브에서 평일 오전 10:50분에 상영을 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라거나 대중성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영화들을 쉽게 구경하기 힘든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씨네큐브와 더불어 하이퍼텍나다, 스폰지하우스 등이 있지요.

전부터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이제서야 보게 된 M, 따로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체 멜로 영화인가 스릴러 영화인가"라는 궁금증을 안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약 50~60명 정도가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인데, 한 예닐곱명이서 본 것 같네요.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 http://www.m0820.com


시나몬님에 따르면 메이저 극장에서 M을 상영할 때는 영화 초반의 지루함 내지는 난해함 때문에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는데, 극장이 극장인 만큼 역시 다들 침착하게 영화에 집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현란한 영상과 음울한 화면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20분 정도만 지나면 오히려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이런 것을 밝히는 것이 스포일러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 영화에서는 줄거리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선형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없이 현실계와 환상계, 혹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여기서 앳되고 순수한 느낌을 주어야 하는 첫사랑의 여학생이라면, 이연희(미미 역)를 캐스팅 한 것은 꽤나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이연희를 좋아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ㅋㅋㅋ 물론 극 초반의 내레이션은 좀 어색했을지라도 말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인공인 민우(강동원)는 소설가이면서도 한 줄 글을 쓸 수 없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고, 약혼자인 은혜(공효진)를 두고도 무엇인가에 홀린 양, 정신을 놓고 지냅니다. 네, 바로 꿈인지 현실인지 그가 소설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토록 잊으려고 했던 첫사랑 "미미"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죠. 미로 안에서 보물을 찾는 것처럼, 수십번을 제자리로 돌아오면서도 내면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미미와(사실상 제가 보기에는 미미와 엇갈렸던 아픔과 미미를 아프게 했다는 스스로의 자책감과) 화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우에게 지친 은혜는 민우를 떠나려 하고,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줄 순 없어?"라고 일갈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우의 눈에 은혜의 모습 위에 미미의 모습이 겹치고 민우의 만류로 이들도 극적으로 화해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 블록버스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농밀하게 그리는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꽤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독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영화'에서 느낀 화두는 과거의 상처에 적극적으로 대면한다면 그 트라우마를 과연 극복할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입니다.물론 한 사람의 경험과 기억이 그 사람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이런 부분에 의해서 사람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집안의 사업이 실패해서 어렵게 자랐거나, 부모님간의 혹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하면 알게 모르게 이러한 경험들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곤 하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성공에 집착한다거나,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될까 두려워 지나치계 관계지향적이 된다거나요. 이러한 경우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이 "닮고 싶어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느새 자신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민우가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한 단계 거듭날 수 있는 것인데요. 다만 이렇게 어렵다고 해도 현실에만 안주하거나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을 한다 해도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세상을 향한 의심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Response : ,


제가 서평 및 칼럼 팀블로그 "책, 계"의 일원이 되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작단계라 별로 볼 것은 없지만, 많이 찾아주세요! :)


팀블로그 책, 계 바로가기

책, 계에서 surfysea의 글들을 살펴보기

Response : ,


#1.

나는 스물다섯살의,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다.


#2.

대학입시가 힘든 것은 사실 언제나 마찬가지일 것이나, 현재 중고등학생들은 자신의 세대를 "죽음의 트라이앵글", "막장세대"로 규정했다. 우리들이 결코 현재 중고등학생들보다 입시가 손쉽고 수월한 시대에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대학 입시가 어떻게 변했니 해도 그 핵심은 여전히 상대평가, 즉 "줄세우기"에 있으므로 대학 정원에 대한 수험생의 비율로 따지면 우리 또래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음은 자명하다.

결국 저항의 힘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유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로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우리는 형식적 민주화가 확립된 87년 이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세대이다. 따라서 저항의 명분이 부족했다. 우리 사회가 형식적으로 민주화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크게 드러난 것은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최장집 교수 등). 우리에게는 "이해찬 세대"라는 별칭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 세대의 계급성을 나타내기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나이, 연공서열, 학력파괴 현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그 나이 또래 혹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끼리만 경쟁하면 되었다. 하지만 경쟁이 한층 더 심화된 요즈음의 세태에서 20대는 또래 집단뿐만 아니라 40대, 50대와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 경험, 지식, 이미 쌓아올린 부의 정도에서 보면 20대가 기성 세대와 경쟁하는 것은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현재 40대가 된 '386세대'는 87년의 저항을 통해, 그리고 이제는 기득권이 되어서 자신의 것을 챙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기성세대에 눌리고 오히려 다음 세대에까지 밀려서 자신의 것을 챙길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석훈의 논리에 따르면 결국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꼭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을 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도 좋고 동영상을 만들어서 공유해도 좋다. 다만 그것이 "붉은악마"와 같이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 세대 내부에서 소통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기득권과 협상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너의 곁을 맴도는 88만원의 유령을 쫓아낼 수 없다.

-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강연을 보고
Response : ,

벌써 1년(복학생 Edit)

Posted 2007. 8. 31. 03:39,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지난 시간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라고 하면 너무 번역체같아서 싫다. 그냥 내가 없이도 잘만 흐르던 시간은 내가 돌아온 이후에도 예전와 다를바 없이 잘 지나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변했고 내 주변 사람들도 변했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변했을 뿐.

생각하는걸 쉬어 생각없이 살았을지언정, 학교는 쉬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덧 졸업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 졸업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예전과 달리 이미 학교를 떠나 있는 것 같다. 왜일까, 단지 학교를 오래 다녀서일까? 단순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반년 전, 야심차게 준비했던 학회 창설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대학의 학생사회는 '전과 같지 않다'. 이것은 나의 대부분을 쏟아부어 각종 모임과 활동에 투자하던 대학 1, 2학년 시절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과 더불어 트라우마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내 대학생활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는 '반'이라는 공간도 이제는 존재의미를 잃었다.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작년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내가 요즈음 그쪽에 참여하지 않고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는 반이라는 공간의 역할과 역량에 대한 마지막 희망도 버렸기 때문이다. 뭐 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 까닭도 있지만, 이제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애정을 거둬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대학은 학문과 지식의 전당이며, 젊음과 도전이 가득한 곳이 아니다.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그야말로 '스펙'을 쌓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곳일 뿐이다. 대학생으로서 많은 고민과 경험을 해 본다고 하다가 자칫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면 바보 취급만 받을 뿐이다.

흔히 "대학 초년생때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라며, 공부나 스펙에 도움이 되는 '자기계발'에 소홀한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궤변일 수 있다. 요즘처럼 학사제도도 빡빡해지고, 취직하기도 힘든 판에 자기 커리어를 누가 책임져 줄 것이란 말인가. 오히려 1학년때부터 착실히 학점관리하고 영어공부 하고, 외국 다녀와서 인턴 경험 하고 취직하는 친구들이 현명한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학생활 동안 자기만의 인생계획과 관점을 세울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장기 계획은 커녕 우리는 학점의 소수점 둘째 자리에 목매고, 영어점수에 매달리고, 가만 있으면 불안하니 자격증이라도 따려 하고, 꼭 무언가를 계속 해야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학점이 좋고, 토익점수가 높고, 사회경험이 많은' 인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강박'을 가진 인재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멈추어 자신을 뒤돌아보며 무엇이 옳고 어떤 것이 부조리한지 생각하기보다는, 이유도 모른 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성과'를 낼 수 있는 그런 인재 말이다.

Response : ,

순수함이라는 잣대

Posted 2007. 2. 20. 01:17,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흔히 우리는 농촌 혹은 시골의 아이들을 "때묻지 않아 순수하다"라고 많이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들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광산지역의 아이들을 만나고 왔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정도의 아이들이었는데, 3~4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가장 많았다. 그곳의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순수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요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경계하기보다는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뿐만아니라 요즘 도시지역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데 이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순수함이라는 잣대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것은, "순수함"이라는 가치에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라는 말을 분석해보자.

도시(악)↔시골(선)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아이들(악)↔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선)

이렇게만 보면 매우 좋은 말 같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보자.

도시(우월한 것)↔시골(열등한 것)
똑똑한 아이들(우월한 것)↔순진해 빠진 아이들(열등한 것)

결국 이 아이들을 비하하거나, 혹은 신비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 아이들의 행동양식이 그러한 것은 단지 경험의 차이일 뿐이다. 마을의 시가지라야 2차선 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1km정도의 1층 건물이 전부이고, 그나마 70~80년대 영화 배경이 될 만한 그런 건물들 뿐이다. 컴퓨터 자체가 귀한데다(시장쪽에 PC방이 있긴 하다) 부모님보다는 할머니/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인터넷 같은 것에 접하기 힘든 환경인 것이다.

따라서 농촌지역의 '순수한 아이들'을 찬미하는 것은 "나는 도시문물을 항상 접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는 기만적 화법일 수 있다. 결국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게다가 '어린이'들을 어른과는 다른 하나의 다른 계급으로 보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것이다(이건 지하생활자님이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ㅋㅋ). 하지만 아이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반드시 어른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분절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난 어렸을 때의 내 삶도 충분히 소중했고, 그 고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Response : ,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당신도 자신의 일은 1을 100처럼 느끼지만, 남의 일에 대해서는 100을 1처럼 느끼지는 않는지?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기기에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90%는 한 귀로 흘려버리고, 9%는 기억하는 척 하고, 1%만을 기억해줄 수 있는 현실을 인정해야 오히려 서로의 앞에 놓인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에 기대를 적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든 간에 밑져야 본전. 그러나 오히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저들이 나를 생각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효과가 있다. 기대가 크지 않으니 실망할 일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람에 대한, 인간에 대한 기대를 부정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라고 본다. 단지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지. 물론 연애처럼 상호간 구속에 대한 독점적 계약을 맺었다든지 하는 특수한 관계에서는 당연히 다른 행동양식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사람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예외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제 딴엔 '소통'을 하고 싶어서라지만, 내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잘 벌인다는 것은 스스로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가운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라는 것은 결국 내 노력에 대한 한계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현상을 두고도 자기에게 편리하게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언젠가는 내 치기어림과 실수조차 하나의 안주거리에 지나지 않을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종국에는 내 어설픈 노력이 성과로 남을지, 아니면 잊고 싶은 헛된 행동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함께 느끼려는 노력과 시도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듯 하다.

Response : ,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Posted 2006. 12. 31. 05:05,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교라는 곳에 입학해서는,
대학에 잘 '적응'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달라진 시간 관념, 대학 강의, 반 활동이나 동아리 활동, '성인'으로 대접받게 되는 새로운 환경......

그러나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는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만족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술 적당히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사람들 많이 만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책 좀 읽으면서 양식도 없는 주제에 개뿔 아는척만 하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막상 지금까지는 '적응'의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던데다 여기에 재미까지 느끼게 되니,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자꾸 승부하게 된다. 삶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꾸 안주하게 된다는 것.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말하기의 '대상'이 달라졌을 뿐, 결국 했던 얘기를 반복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릇 자체가 작은데 언제까지나 그거 하나만 붙잡고 만족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생 추억만 파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인데.

만약 내가 단지 적당히 술마시고 사람들 비위맞춰줄 수 있는 능력과, 실무에 적용가능한 '테크니컬한' 지식만 갖추어서 대학 문을 나선다면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부분들이 거세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예를들어 몸이 많이 안좋아져서 술을 마시게 될 수 없게 된다던지, 기술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내가 아는 것들이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면지 하면 말이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렇게 표류할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매우 주체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인생에 있어서 '내공'이 중요한 것이겠지. 따라서 술자리가 만든 '나'의 허구적인 모습에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며, 삶을 바라보는 지혜로서의 공부가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어쩌면 매우 '타협적'인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고민과 방황과 고뇌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는 것이 좋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 했지만, 내 인생도 역시 도전과 응전의 연속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2006년의 마지막 날에.


Response : ,

미녀는 괴로워? 비주류는 괴로워!

Posted 2006. 12. 28. 01:30,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녀는 과연 괴로웠을까.



(스포일러가 있으니 나중에라도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김아중의 뚱보 연기로 화제가 된 이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뚱뚱하고 못생긴 주인공 '강한나'는 전신성형을 해 날씬한 미모의 '제니'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는 가수가 되겠다는 꿈과 오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친구도 버리고 치매에 시달리는 아버지도 모른척한다. 때문에 그녀는 한참을 괴로워하다 결국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과거를 대중앞에서 고백하는 결단으로, 다시 '강한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처럼 극을 은근슬쩍 마무리하고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해피엔딩이 아니다. 영화는 양심고백으로 인해 '제니'는 망했어도, '강한나'로서는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못생기고 뚱뚱했던 과거를 밝혔다고 해서 그녀가 다시 예전의 강한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현재의 그녀의 모습은 결국 '제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거를 고백했다고 해도 현실 사회에서는 외모의 변화로 인해 사람들 간의 '관계맺기'의 변화가 같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외모가 급격하게 변한 경우라면 사람들간의 관계맺기에 있어서도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전신성형 후의 강한나는 그녀 본인이 "난 예전의 마음과 똑같다"라고 주장하더라도 예전과는 절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강한나가 전신성형으로 "예뻐지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을까?
수천 수만명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멋진 무대에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까?
과거의 모습과 전신성형을 고백했을 때 수많은 관객들이 "괜찮아"를 외쳐주었을 것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인가?

영화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지 몰라도, 현실 사회에서는 99% "아니다". 이 영화는 현실을 호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멋진 가상현실을 그려내고 있지도 않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못생겨도 마음만 예쁘면 진심이 통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예뻐져야 기회가 생기고 성공할 수 있다"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 그녀의 양심고백으로 그녀의 전신성형을 무상으로 집도한 성형외과 의사가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을 암시(왜냐고? 강한나는 전혀 티가 안나게 수술이 너무 잘됐으니까!)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에서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성형외과 의사나 돈을 벌고, 위험도가 높은 기업대출보다 주로 힘든 삶을 사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가계대출로 돈벌이에 주력하는 금융권의 모습이 겹쳐진다. 심지어 이 영화는 부재하는 어머니와 무능력한 아버지를 그려 "부모덕조차 볼 수 없는" 유리 천장에 갇힌 젊은이의 모습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까지 하다. 강한나는 이 유리천장을 깨부쉈다기 보다는 외모의 쇄신으로 인해 '끌어올려졌을 뿐'이다.

못생기고 뚱뚱하던 강한나가 멋진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또 사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그건 현실을 은폐하는 영화적 '사기'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외모의 급격한 변화(어쩌면 계층이동으로 표상되는)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지고 '지위'가 변동하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2006. 12. 27)

Response : ,

알고보면 세상은

Posted 2006. 12. 28. 01:26,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계라,

그래서 눈앞의 성공보다는
인생의 10년, 20년 계획을 짜서 준비한다면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나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한결같을 수 있을텐데

외모나 경제적 조건만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기만의 매력을 가꾼다면
그래서 그 은은한 향기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면
지금 친구나 연인과 문제가 있다고 해도
종국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근데 살다보면 이걸 자꾸 잊게 된단 말이지.

(2006. 11. 8)

Response : ,

된장녀와 불안

Posted 2006. 12. 28. 01:23,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잠깐 생각을 해봤다. 대개는 된장녀를 마구 욕하거나, 반대로 된장녀라는 실체는 없으며 한국 남성들의 마초 성향이 다시 한번 드러난 사건이라고 정리하는 분위기 같은데.

'된장녀의 하루'에서 언급된 "스타벅스"와 "명품"에 주목해보자. 된장녀를 욕하는 요지는 그런 것 아닌가. "자기가 뉴요커인줄 착각하고 있다". 즉 '허영과 방종의 소비'라는 것인데, 이는 남성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다. 흔히 스포츠에 열광하고 게임에 몰입하는 것은 '건전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취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스포츠나 게임 산업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숙히 침투해 있는 것이 현실에서 우리는 알게모르게 엄청난 소비를 하고 있다. 월드컵 마케팅의 그 많은 비용이 다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을지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명품을 한두개 걸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즐긴다고 해서 뉴요커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프리미어리그나 프로e스포츠에 열광한다고 해서 그가 수천억대 연봉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각종 미디어와 제도에 의해 '허영'의 소비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같은 굴레가 씌워진 것일 뿐.

결국 같은데 왜 이런 일들이 발생했는가? 혹자는 신분상승이 더 어려워진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남성들의 상실감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이것은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결국은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전보다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된장녀를 욕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막연한 불안감에 의해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불안'을 파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6. 9. 3)

Response : ,

라디오방송 주파수

Posted 2006. 12. 28. 01:22,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FM방송]
 89.1MHz KBS 2FM
 89.7MHz 원음방송
 91.9MHz MBC FM4U
 93.1MHz KBS 1FM
 93.9MHz CBS 음악FM
 95.1MHz 교통방송
 95.9MHz MBC 표준FM
 97.3MHz KBS 1라디오
 98.1MHz CBS 표준FM
 99.1MHz 국악방송
101.1MHz 국군방송
101.9MHz 불교방송
102.7MHz AFN
103.5MHz SBS 러브FM
104.5MHz EBS
105.3MHz 평화방송
106.1MHz KBS 2라디오
106.9MHz 극동방송 표준FM
107.7MHz SBS 파워FM

[AM방송]
 603KHz KBS 2라디오
 639KHz KBS 3라디오
 711KHz KBS 1라디오
 792KHz SBS AM
 837KHz CBS
 900KHz MBC AM
 972KHz KBS 사회교육
1134KHz KBS 사회교육
1170KHz KBS World
1188KHz 극동방송
1530KHz AFN

Response : ,

말할수 없었다

Posted 2006. 12. 28. 01:21,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말할수 없었다
                              - greentea

우연히 만난 네 뒷모습
발뒤꿈치에서 정수리까지
나도 모르게 올라버렸지.

빛나는 다리와 찰랑거리는 머릿결
그녀와 닮았단 생각을.

하지만 지금은 안돼,
허튼생각이라며 나를 달래고
다시금 너를 앞서서
이제는 너를 등지고 종종걸음으로.

어떤게 좋을까,
바바리안 크림보다는 스트로베리필드-
오렌지주스 없으면 콜라로 주세요,

삼천백원입니다.
뒤를 돌아
혼자 앉을 만한 곳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네 앞모습을 다시 만나다.

초컬릿을 얹은 휀시처럼
달콤한 상상은 길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 흔한 남자여서
말을 걸긴 커녕
먼치킨만한 소심한 내 가슴을 탓하며

몸은 가만히 앉아있는데
마음은 제자리를 뱅뱅돌아
눈앞에 가득한 도너츠처럼
한바퀴 돌아도 다시 제자리일뿐.

게다가 그놈의 도너츠
한가운데가 뚫려버린 내 가슴마냥,
그건 너의 자리였지만
결국 먼치킨 하나만 숨어들어오다.

사실 그건
뫼비우스의 띠였는지도.
그래서
숨을 수도 숨길 수도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흔한 남자로 돌아온 지금에도
어제의 너를 생각하고
잠깐의 향기와 설렘을 추억할 수 밖에는.

(2006. 5. 12)

Response : ,

어른이 된다는 것

Posted 2006. 12. 28. 01:18,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선생님은 숨을 내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숨이 공중에 퍼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한는 것처럼.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인데?"

미치 앨봄, 공경희 역,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세종서적, 2005


  어릴적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스러움'을 동경했었다. 부모님은 당신의 생각을 언제나 강요하거나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집안 사정과 부모님의 생각을 눈치빠르게 읽어버린 나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워야 하는' 행동양식을 자연스럽게 체화시켰다.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함이었고, 어릴적 남동생과의 미묘한 경쟁에서 나를 유리한 고지에 올려놓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에 대한 동생의 대응방식은 철저한 모방이었다. 심지어 내가 사먹는 과자 종류와 개수까지 똑같이 따라했다! 그랬던 그도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것의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꿨다. '덜 합리적이지만 더 인간적인 것으로'. 나는 그때 명확히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냉정한 판단'을 삶이라는 나무를 재단하는 연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무언가 계속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나는 오히려 이제는 내가 나를 모방하던 동생에게 조금씩 배워야 할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어느덧 우리는 '피보호인'이 아니라 충분히 '보호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부모님이 힘들여 돈을 벌어 오는것에 대해 전처럼 '관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걱정하고, 가계경제에도 신경쓰게 되었다. 동생과 방을 따로 쓰게 된 이후 오랜만에 우연히 나란히 누워 자게 된 날, 어둠속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비록 이야기속에서였지만 동생이 사랑했던, 또 추억했던 이를 만날 수 있었고, 또 그래서 무척이나 놀랐다. 마치 부모님이 젊었을 때 만나던 다른 상대의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이랄까. 당연히 그럴만한 일들이지만 한편으로 무척이나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형제는 흔히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만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덧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도 이제 20대의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나이가 한 살 많아질때마다 그 무게감이 엄습해오는것을 느낀다. 한살씩 더 먹을때마다 지난 일년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생각으로 속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에 있어서 또다른 자리매김을 할 수 있고, 그렇게 '전과는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있다. 지나간 시간은 사실 내안의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 숨어있었을 뿐, 예전보다 좀 더 여유롭고 성숙한 마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나이가 주는, 세월이 주는 큰 축복이 아닐까.

(2006. 5. 10)

Response : ,

얼마 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하 WBC)이 많은 관심속에 결국 일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4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언론은 연일 찬사를 쏟아냈고 시민들은 마치 지난 2002년을 떠올리듯 야구에 열광했다.

나 또한 야구팬이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 '군인'라는 시공간적 제약에도 온 정신을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릴적 나의 우상과 같았던 구대성 선수의 활약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기뻤다. 그러나 누구나 야구 대표팀에 대한 칭찬과 찬사에만 열을 올릴 때 나는 그 반대로 뭔가 찜찜한 구석을 감출 수가 없었다.

WBC는 얼핏 생각하면, 야구를 대표하는 국제 기구인 국제야구연맹(IBAF)이 개최했을 것 같지만, 알고보면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MLB)에서 주최한 것이다. 굳이 야구월드컵이 아니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야구월드컵(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은 국제야구연맹이 이미 34회까지 개최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WBC는 그 탄생배경이 '국가대항전'을 벌인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월드컵축구에 밀려 식어가는 야구열기를 되살리고, 축구보다 참여하는 국가가 훨씬 적은 야구를 전세계적으로 흥행시키는 것에 그 주목적이 있다. 자, 이렇게 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전세계적으로 야구가 인기를 얻으면 좋은 것 아닌가? 물론 야구의 인기가 높아지면 야구팬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WBC는 결국 메이저리그의 흥행을 염두에 둔 노림수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까운 예로 축구를 들 수 있다. 월드컵축구는 이제 어쩌면 올림픽보다 더 영향력이 큰 행사로 성장했다. 뿐만아니라 각국이 축구에 대한 투자에 힘쓰면서 각국은 전보다 전력이 평준화되었고, 제3세계에서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는 유럽의 빅리그들이 월등한 자본력으로 각국의 우수선수들을 독식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도 유럽의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 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게다가 월드컵축구가 흥행하면서 관중들은 '눈'이 높아져버렸다. 따라서 빅리그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축구리그는 피폐해지고 인기가 떨어진다.

월드컵 개최 이후 한국에서 아무리 정책적으로 축구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해도 막상 프로리그에 관중이 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스타플레이어가 '물건너' 가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빅리그가 아닌 경우에는 리그 자체적으로 산업적으로 성공할 기회가 줄어들게 되고, 주변부 리그는 빅리그를 따라잡기 위해 축구 선진국에서 각종 인적, 물적, 제도적 자원을 수입한다. 축구와 그와 관련된 토대를 하나의 세계로 본다면, 그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빅리그들은 자본력이나 인적구성면에서 월등히 앞서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고, 그 차이는 '지속된다'. 공은 둥글지 않고, 누구나 축구공 앞에서 평등한 것도 아닌 것이다.

위의 두 문단에서 '축구'를 '야구'로, '유럽'을 '미국'으로만 바꾸면 그게 바로 여기서 전달하려는 내용이 된다. 사실 야구는 축구보다 훨씬 상업화하기 좋은 스포츠이다. 단적으로 광고 가용시간만 살펴봐도, 축구는 쉬는 시간이 1번 밖에 없지만 야구는 공수교대, 투수교체 등 광고를 넣을 수 있는 시간이 1경기에 대략 20회 정도씩 발생한다! 게다가 경기에 필요한 장비도 많기 때문에 '이것저것 팔아먹을 거리가' 많다.

WBC가 막을 내리고 한국 야구의 현주소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낙후된 기반시설을 혁신하기 위해 돔구장을 건설해야 한다느니 오히려 그 돈으로 깨끗한 야외 야구장 5개를 건설하는게 낫다느니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좋다.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야구를 즐기는 것은 야구팬의 꿈이니까.

그런데 한국에 없는 것은 돔구장만이 아니다.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현재 존재하는 것은 '선수노조'가 아니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라는 모호한 단체이다(물론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선수들도 살고 관중들도 즐거운' 제대로 된 야구를 보기 위해서는 물적 기반뿐만 아니라 제도적 장치도 갖추어져야 하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한국팀의 선전은 헝그리 정신으로 일구어낸 야구 변방의 승리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거대한 상업주의 기획에 대한 패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06. 3. 25)

Response : ,

나는 상식없는 예술가다" - Nancy Rang

Posted 2006. 12. 28. 01:14,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그녀의 인터뷰.

글쎄다... 난 잘 모르겠다.


'상식없는 예술가'여야 하는지

'상식을 뛰어넘는 예술가'여야 하는지를

(2006. 2. 20)

Response : ,

여자는... 남자는...

Posted 2006. 12. 28. 01:10,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세상에는 '남자는 어떻다', '여자는 어떻다'와 같은 담론들이 넘쳐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SBS의 '야심만만'등이다. 인터넷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사랑', '이런 여자', '이런 남자'를 찾는 글이 수없이 포스팅되고 스크랩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글들이 개인의 취향에 따라 저마다의 생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천편일률적인 이성관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전형'으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60억이 넘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다 똑같을까. 그런식의 담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혹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취급하게 만들 뿐이다.

특히 쉽게 생각하면 여성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사실 여성성에 대한 지나친 신성화는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특히 제일 짜증나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 운운하며 "남자가 져주는게 이기는거다"식의 서술이다. 이것은 여자를 '주체성이 없는',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소위 어린애 취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약하고' '보호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상징화된것과 같은 맥락에서 "여자가 위험하게 어디 밤거리를 싸돌아다녀!" 따위의 언사가 나타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상의 수많은 이성에 대한, 사랑에 대한 글들. 낭만적이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좀 걸러서 보자. 결국은 그런 글 때문에 자기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다.

(2004. 7. 4)

Response : ,

뭐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꾸미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상품으로서 '진열'하는 행위라든지

이른바 싸이질과 1촌 관리가 흔히 '여가 생활'의 일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인적 네트워크 '관리'로 일과 여가의 관계가 불분명해져 이것은 탈산업사회의 교묘한 노동력 관리 기획이라든지

어디 대학원신문에나 나올법한 얘기들로,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한가득 주절거릴수도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지식이나 감정의 생산이 쉬워진 만큼 소비도 더 쉬워지고 일회성에 가까워졌단 얘기.

분명히 평소에 자주 연락하고 지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장점은 있지만,

방명록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써주고, 내가 또 많은 곳들에 글을 남겨도 막상 실제로 만나서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친한 친구와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알게모르게 수많은 '검열'의 논리가 작용하는데, 자신만의 공간 미니홈피라 하지만 어차피 공개된 공간에서 글을 올리는 행위는 '여과된' 정보만 선택할 수 밖에 없다.


90년대 중후반 PC통신이 대유행이었고, 2000년 전후로 해서는 다들 커뮤니티 활동에 열을 올렸다. 다들 아이러브스쿨과 다모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내가 시대의 흐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004년 현재에는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유행이다. 이러한 종류가 현재 시점에서 '젊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가장 좋은 미디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될까?

20년이 지나 우리가 40대가 되어도 미니홈피와 블로그에 열광하고 있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욕망의 진화에 따라 또 다른 매체가 출현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2004. 5. 29)

Response : ,

화려한 대학 캠퍼스 사진의 이면

Posted 2006. 12. 28. 01:06,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사실 나도 학교 풍경사진을 '꽤 긍정적인 관점에서' 찍어서 많이 올리고는 있지만, 여기에는 많은 함정이 있다.

내가 찍은 '아름다운 학교'의 모습들은 내 자의적 판단에 의해 취사선택된 기억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따라서 이것이 그 당시 학교의 모습을 전부 나타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봄의 학교에는 나처럼 아름다운 배경을 찾아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도 있으나, 도서관이나 고시실에서 시험을 좇아 햇빛도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백양로에서 교통정리를 하시는 분들, 건물 청소를 하시는 분들, 학교 식당에서 음식을 담당하시는 분들 등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은 이 학교 학생인 선후배동기들과 교수뿐만이 아니다. 흔히 강사라고 부르는 비정규직교수들과 주로 용역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는 노동자 등 우리는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학교가 돌아갈 수 있는 것임을 쉽게 인지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저 학교 사진을 보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로 뒤에 총학생회가 본관점거를 하며 교육투쟁을 하고 있고, 학교 곳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쉴 시간도 없이 최저임금수준의 보수로 헐떡인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양쪽 측면이 모두 쉽게 떠오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저 이면에 숨겨진 일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내 선택으로 인해 내 기억에는 편향이 일어날 것이다.

조금만 현상의 이면을 보려 노력해보자. 인간은 본래 미를 추구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세계에는 그렇게도 아름다운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004. 5. 2)

Response : ,

통일주의자도 통일주의자 나름

Posted 2006. 12. 28. 01:03,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할까? 그것은 '남한과 북한'이 합쳐지는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쳐지는 것인가?

한국 사람들은 대개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그랬다'라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중요한것은 민족중흥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인 것이다.

사실 한반도의 평화만 보장된다면 그것이 어떤 협정이 되었든, 연방이 되었든, 하나의 국가로 되든, 그저 상황적 변화일 뿐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것은 사실 평화를 위한 유효한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통일 과정에서 물리적인 폭력이든 은폐된 권력으로부터의 폭력이든 한반도에 사는 주민들에게 폭력이 가해질 위험이 있을 것이다.


반론 1. 장기 독재로부터 시달리는 북한 주민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세계 인권의 수호자 미국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다. 물론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독재를 '옳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럼 예전에 박정희가 장기집권하던 시절에는 미국이 박정희를 밀어내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신 통치해줘도 됐겠네? 자체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거지 외부에서 억지로 개입할 일은 아니다(물론 국제 사회 여론을 형성할수는 있겠다).


반론 2. 민족 정기를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공부좀 하자. 민족 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민족이고 어디까지가 민족이 아닌가? '같은 혈통, 같은 언어, 같은 뭐시기뭐시기'? 예전에 고구려와 신라는 쓰는 말도 달랐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 한국은 다민족국가네~ ㅋ 당신이 말하는 근대적 개념의 '민족'이 꼭 단일국가를 이루고 있지 않더라도 다들 잘 살고 있다. 이산가족의 경우는 좀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것의 해결방법이 꼭 통일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과 '한국'이 서로 적대국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처럼 우호적으로 교류할 수 있게 되면 해결 방법은 나오게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꼭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론 3. 통일한국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아마 당신은 이런 논리를 펼 것이다. "남한의 기술력과 북한의 자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남북한의 군사력을 합치면 통일한국은 단숨에 군사강국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더이상 서러움의 역사는 없다."

당신은 지금 세계의 '제국'들이 제3세계를 착취하는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북한이 무슨 식민지인가? 당신이 말한 식으로 되면 통일이 되어도 고위층이 아닌 평범한 북한 출신 주민은 2등 국민이 될 뿐이다. 이제 약자에서 강자로 위치가 바뀌었으니 이젠 마구 착취해도 된다는 것인가? 이제는 제발 사회진화론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보자.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무슨 통일반대론자 같지만, 전 평화를 사랑하는 한명의 시민일 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수구적, 반인권적' 통일 논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GNP Racism'에 대해서도 사실 고민해 볼 부분이 많겠지요.

(2004. 2. 12)

Response : ,

보호자동의와 보호자되기

Posted 2006. 12. 28. 00:57,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오늘 외할머니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즉 보호자와 동행한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서 갔다는 말이다.

사실 내가 여러 행정 절차에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없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제 만으로 20살일뿐. 올해서야 드디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보통 미성년자 혹은 노인이 어떤 행위를 하려 할 때, 보호자의 도움이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 보호자는 주로 교육받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성인이 된다. 따라서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했을 때, 미성년자와 노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통제의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일을 올바르게 결정하고 그렇지 못하는 것에 사실상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투표권을 가진 되는 20살과 그렇지 않은 19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혹자는 성인으로서의 권리는 현대 사회의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과연 현재의 보통/중등교육은 편파적이지 않은가? 과연 '시민'을 만드는가 체제수호를 위한 '국민'을 만드는가?

이는 결국 약자들을 '보호해야 하고 가르쳐줘야 하는' 대상으로 타자화시키는 것이다. 사회가 내리는 잣대에 따라(주로 나이로) 개인의 주체성을 평가하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과 부양해야 할 사람을 나누는 것.

물론 어느정도의 '보호'는 필요하겠으나 그것이 법적/제도적 장치가 되어야지 개인적인 차원으로 떠맡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뭐 지금도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고액의 상품등을 구입했을 경우 취소할 수 있는 등 여러 보호 조항이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중환자의 오랜 치료로 인해 가정경제가 파탄나는것이, 돈이 없어서 치료를 중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환자도 죽고 가족도 죽게 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냐는 말이다.

보호자가 없어서? 한국인의 그 '가족애'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 이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능력있고 잘난 보호자가 있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능력없는 보호자'의 존재는 대상을 부양할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사회보장혜택도 받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보호자/피보호자를 나누는 것은 경제활동연령층에 대한 통제 논리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가족부양'의 의무를 지우기 위해. 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기꺼이 내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2004. 1. 29)

Response : ,

인간의 정보처리능력이란!

Posted 2006. 12. 28. 00:53,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Aoccdrnig to a rscheearch at Cmabrigde Uinervtisy,
It deosn't mttaer in waht oredr the ltteers in a wrod
are, the olny iprmoetnt tihng is taht the frist and
lsat ltteer be at the rghit pclae.
The rset can be a total mses and you can sitll raed it
wouthit porbelm.
Tihs is bcuseae the huamn mnid deos not raed ervey
lteter by istlef, but the wrod as a wlohe.

Fcuknig amzanig huh?


--------------------

예전에 들었던 사회심리학 수업 게시판에 누군가가 올렸던 글이다.

스펠을 뒤죽박죽 늘어놓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은가?

Response : ,

티스토리를 시작합니다.

Posted 2006. 12. 28. 00:48, Filed under: 카테고리 없음

산울림의 무지개


왜 울고 있니 너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왜 웅크리고 있니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너를 위로하던 수많은 말들 모두 소용이 없었지

어둠 속에서도 일어서야만 해 모두 요구만 했었지


네가 기쁠 땐 날 잊어도 좋아 즐거운 땐 방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슬플 땐 나를 찾아와 줘 너를 감싸안고 같이 울어 줄께

네가 친구와 같이 있을 때면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께

모두 떠나고 외로워지면은 너의 길동무가 되어 걸어 줄께


--------------------

기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한계를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이곳으로 왔습니다.

뭐 거창한 말보다는 알찬 내용으로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Response : ,


Tag cloud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Recent Trackbacks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Bookmarks

  1. 도서관 희망 원정대
  2. 책, 계
  3. 잊혀진 이야기
  4. 아상지우 음악살롱
  5. 가면과 내면
  6. Bismillah, No. 6
  7. 시나몬의 블로그

Site Stats

TOTAL HIT
TODAY HIT
YESTERDAY HIT